코트니 휘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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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트니 휘트니는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미국 육군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참모로 활동하며 필리핀 민정 업무를 담당했고, 일본 점령기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민정국장으로서 일본국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맥아더 해임 후 예편했다. 그는 맥아더의 측근으로서 일본 점령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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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니 휘트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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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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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코트니 휘트니 |
출생일 | 1897년 5월 20일 |
사망일 | 1969년 3월 21일 |
출생지 | 워싱턴 D.C., 미국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버지니아, 미국 |
군사 경력 | |
소속 | 미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7년–1951년 |
최종 계급 | 소장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훈장 | 육군 수훈 복무 훈장 은성 훈장 훈공장 (2회) |
기타 | |
직업 | 변호사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코트니 휘트니는 워싱턴 D.C.에서 태어나[5] 1917년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추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주둔 중 콜럼비아 내셔널 로 스쿨(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법학 박사(Juris Doctor) 학위를 취득했다.[5] 1927년 제대 후 1940년까지 마닐라에서 법률 사무소를 개업하고 동시에 광산 등의 사업 활동을 했다.[5]
1940년 육군에 복귀했다. 일본군에 의한 필리핀 전토 장악에 대응하여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하에 오스트레일리아 기지를 거점으로 필리핀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하고 대일 게릴라 활동을 지휘하여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5] 1944년 전선에 복귀하여 맥아더와 함께 레이테 만에 상륙했다.[5] 맥아더의 전기를 집필한 윌리엄 맨체스터에 따르면, 이때 "마닐라의 초보수적인 변호사"였던 휘트니는 맥아더의 참모로 선택되어 필리핀 민정 책임자로 임명되었다.[6] 또한, 맨체스터에 따르면 휘트니는 자산가가 아닌 모든 필리핀인을 멸시하고 "좌익 게릴라를 지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남서 태평양 지역에서의 전략정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활동을 금지했다.[6]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2. 2. 법조계 경력
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휘트니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서 정보 업무를 담당했다.[1]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를 남서태평양 전역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중국 주둔 제14공군의 정보 장교로 임명되었다.[1] 1944년 휘트니는 맥아더와 함께 레이테 만으로 돌아왔다.[1][5]
윌리엄 맨체스터는 맥아더의 전기를 썼는데, 중령 휘트니를 "극우적인 마닐라 기업 변호사"로 묘사하며, 그가 맥아더 참모부에 배치되어 승진하고 필리핀 민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적었다.[2][6] 맨체스터는 게릴라의 관점에서 볼 때 휘트니는 외교적이지 않고 호전적인 인물로, 필리핀에 상당한 투자를 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필리핀 사람들을 깔보았기 때문에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기술했다. 또한 맥아더가 레이테에 상륙할 준비가 되었을 무렵, 휘트니는 참모 대부분을 반동주의로 전향시켰으며, 그의 촉구에 따라 맥아더는 남서태평양에서 OSS 요원들을 배제했는데, 이는 휘트니가 그들이 좌익 게릴라를 지원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6]
3. 1. 정보 장교 복무
1940년, 휘트니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서 정보 업무를 담당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를 남서태평양 전역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중국 주둔 제14공군의 정보 장교로 임명되었다. 휘트니는 1944년 맥아더와 함께 레이테 만으로 돌아왔다.[1]윌리엄 맨체스터는 맥아더의 전기를 썼는데, 중령 휘트니를 "극우적인 마닐라 기업 변호사"로 묘사하며, 그가 맥아더 참모부에 배치되어 승진하고 필리핀 민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적었다.[2] 맨체스터는 게릴라의 관점에서 볼 때 휘트니는 외교적이지 않고 호전적인 인물로, 필리핀에 상당한 투자를 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필리핀 사람들을 깔보았기 때문에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기술했다. 또한 맥아더가 레이테에 상륙할 준비가 되었을 무렵, 휘트니는 참모 대부분을 반동주의로 전향시켰으며, 그의 촉구에 따라 맥아더는 남서태평양에서 OSS 요원들을 배제했는데, 이는 휘트니가 그들이 좌익 게릴라를 지원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
3. 2. 맥아더와의 관계
1940년, 휘트니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서 정보 업무를 담당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남서태평양 전역에 배치되었고, 중국 주둔 제14공군의 정보 장교로 임명되었다.[1] 1944년 맥아더와 함께 레이테 만으로 돌아왔다.[1]윌리엄 맨체스터는 휘트니를 "극우적인 마닐라 기업 변호사"로 묘사하며, 맥아더 참모부에 배치되어 필리핀 민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2] 또한, 맨체스터는 휘트니가 자산가가 아닌 모든 필리핀인을 멸시하고 "좌익 게릴라를 지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남서 태평양 지역에서의 전략정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활동을 금지했다고 한다.[6]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후인 1945년 8월 30일, 맥아더와 함께 아쓰기 기지에서 일본에 입국했다. 이후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SCAP) 민정국(GS) 국장에 취임하여 일본국 헌법 초안 작성을 지휘했다.
휘트니는 일본 점령기부터 한국 전쟁까지 맥아더의 측근으로서 활약했다. 1951년 해리 S. 트루먼과 대립한 맥아더가 해임된 후, 휘트니는 예편했다.
3. 3. 필리핀 민정 업무 담당
1940년, 휘트니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워싱턴 D.C.에서 정보 업무를 담당했다.[1]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를 남서태평양 전역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중국 주둔 제14공군의 정보 장교로 임명되었다.[1] 1944년 휘트니는 맥아더와 함께 레이테 만으로 돌아왔다.[1]윌리엄 맨체스터는 중령 휘트니를 "극우적인 마닐라 기업 변호사"로 묘사하며, 그가 맥아더 참모부에 배치되어 승진하고 필리핀 민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말한다.[2] 맨체스터는 휘트니가 자신처럼 필리핀에 상당한 투자를 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필리핀 사람들을 깔보았다고 비판했다.[2] 또한, 맥아더가 레이테에 상륙할 준비가 되었을 무렵, 휘트니는 참모 대부분을 반동주의로 전향시켰으며, 그의 촉구에 따라 맥아더는 휘트니가 좌익 게릴라를 지원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에 남서태평양에서 OSS 요원들을 배제했다.[2]
4. 일본 점령기 활동
일본 항복 후, 휘트니는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아쓰기 공군기지로 가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민정국장이 되었다.[3] 그는 밀로 로웰 중령과 함께 일본국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3] 이 초안은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역사학자들은 점령 정책이 1930년대 미국의 뉴딜 정책 프로그램과 유사하다고 평가한다.[3] 무어와 로빈슨은 "뉴딜 자유주의는 맥아더와 휘트니와 같은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에게도 자연스러워 보였다"고 지적한다.[4]
1946년 2월 3일, 맥아더는 헌법 개정의 필수 요건(소위 “맥아더 3원칙”)을 코트니 휘트니 GHQ 민정국장에게 제시하고 1주일 이내에 헌법 개정안 작성을 지시했으며,[7] 다음 날부터 민정국 내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휘트니가 지휘하여 작성한 소위 “맥아더 초안”은 같은 해 2월 12일에 완성되어 2월 13일, 휘트니 자신의 손으로 아카사카(麻布) 외무대신 관저에서 요시다 시게루와 헌법 담당 국무대신 마쓰모토 마사하루에게 전달되었다.[7]
동시에 휘트니는 마쓰모토 마사하루가 제출한 헌법 개정 요강(마쓰모토 甲案)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서로서, 최고사령관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통보를 했다. 이 전달 시 일본 정부 측 참석자들에게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천황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우리는 원자력의 일광욕을 하고 있다” 등의 협박적인 언행을 했다.[7]
일본 정부는 전달받은 GHQ 초안에 따라 헌법 개정 방침을 결정하고, 일본안(3월 2일 안)을 작성했다. 3월 2일 안은 “도저히 삼킬 수 없는”(恰モ毬(いが)ノママノ栗ノ如ク到底之ヲ呑ミ込ムコト能ハ) GHQ 초안을 “일단 큰 밤송이를 따서 일부 껍질을 벗기는 정도”(一応大ナル毬ヲ取リ一部皮ヲ剥ク程度)로 한 것이었다(마쓰모토 마사하루 수기).[7]
1946년 3월 4일 오전 10시, 일본 정부와 GHQ는 황궁의 해자(壕端)에 위치한 제일생명 빌딩(구 일본군 동부군 관구 사령부, 지요다구 유라쿠초) 6층 민정국에서 초안 작성 책임자 휘트니 참석 하에 초안(마쓰모토 甲案) 협의를 시작했고, 일본 정부가 GHQ 초안의 일본어 번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협의는 GHQ 초안 검토로 이행되었다.[7] 오후 6시경, 새벽까지 확정 초안(파이널 드래프트)을 완성하려는 GHQ의 의향에 따라 협의는 밤샘으로 진행되어, 협의 시작으로부터 32시간 후인 다음 날 3월 5일 오후 3시경에 종료되고 확정 초안이 만들어졌다. 협의 끝에 확정된 일본국 헌법 초안을 일본 정부는 3월 6일 오후 5시에 헌법 개정 초안 요강으로 발표했다.[7]
4. 1. GHQ 민정국장
일본 항복 후, 휘트니는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아쓰기 공군기지로 가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민정국장이 되었다.[3] 그는 밀로 로웰 중령과 함께 일본국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3] 이 초안은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역사학자들은 점령 정책이 1930년대 미국의 뉴딜 정책 프로그램과 유사하다고 평가한다.[3] 무어와 로빈슨은 "뉴딜 자유주의는 맥아더와 휘트니와 같은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에게도 자연스러워 보였다"고 지적한다.[4]
1946년 2월 3일, 맥아더는 헌법 개정의 필수 요건(소위 “맥아더 3원칙”)을 코트니 휘트니 GHQ 민정국장에게 제시하고 1주일 이내에 헌법 개정안 작성을 지시했으며,[7] 다음 날부터 민정국 내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휘트니가 지휘하여 작성한 소위 “맥아더 초안”은 같은 해 2월 12일에 완성되어 2월 13일, 휘트니 자신의 손으로 아카사카(麻布) 외무대신 관저에서 요시다 시게루와 헌법 담당 국무대신 마쓰모토 마사하루에게 전달되었다.[7]
동시에 휘트니는 마쓰모토 마사하루가 제출한 헌법 개정 요강(마쓰모토 甲案)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서로서, 최고사령관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통보를 했다. 이 전달 시 일본 정부 측 참석자들에게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천황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우리는 원자력의 일광욕을 하고 있다” 등의 협박적인 언행을 했다.[7]
일본 정부는 전달받은 GHQ 초안에 따라 헌법 개정 방침을 결정하고, 일본안(3월 2일 안)을 작성했다. 3월 2일 안은 “도저히 삼킬 수 없는”(恰モ毬(いが)ノママノ栗ノ如ク到底之ヲ呑ミ込ムコト能ハ) GHQ 초안을 “일단 큰 밤송이를 따서 일부 껍질을 벗기는 정도”(一応大ナル毬ヲ取リ一部皮ヲ剥ク程度)로 한 것이었다(마쓰모토 마사하루 수기).[7]
1946년 3월 4일 오전 10시, 일본 정부와 GHQ는 황궁의 해자(壕端)에 위치한 제일생명 빌딩(구 일본군 동부군 관구 사령부, 지요다구 유라쿠초) 6층 민정국에서 초안 작성 책임자 휘트니 참석 하에 초안(마쓰모토 甲案) 협의를 시작했고, 일본 정부가 GHQ 초안의 일본어 번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협의는 GHQ 초안 검토로 이행되었다.[7] 오후 6시경, 새벽까지 확정 초안(파이널 드래프트)을 완성하려는 GHQ의 의향에 따라 협의는 밤샘으로 진행되어, 협의 시작으로부터 32시간 후인 다음 날 3월 5일 오후 3시경에 종료되고 확정 초안이 만들어졌다. 협의 끝에 확정된 일본국 헌법 초안을 일본 정부는 3월 6일 오후 5시에 헌법 개정 초안 요강으로 발표했다.[7]
5. 한국 전쟁 참전
휘트니는 한국 전쟁 중 더글러스 맥아더를 수행했으며 전선에서의 짧은 방문으로 은성무공훈장과 두 번째 공훈 훈장을 받았다.[3] 1951년 맥아더가 사령관직에서 해임된 후 군에서 사퇴했다. 그는 퇴역식에서 육군 훈장을 받았다.[3]
5. 1. 맥아더와의 동행
5. 2. 맥아더 해임과 퇴역
6. 말년 및 평가
코트니 휘트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5] 필리핀 레이테에 있는 맥아더 상륙 기념 국립공원에는 맥아더와 그의 일행이 레이테 해안에 상륙하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이 있는데, 휘트니의 조각상은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카를로스 P. 로물로의 조각상 뒤에 있다. 1977년 영화 《맥아더(MacArthur)》에서 휘트니 역은 딕 오닐(Dick O'Neill)이 연기했다. 제임스 웹의 역사 소설 "황제의 장군(The Emperor's General)"에서 휘트니는 맥아더의 핵심 고문 중 한 명으로 자주 등장한다.
1956년에는 저서 『MacArthur - His Rendezvous with History』(『일본에서의 맥아더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抄訳:마이니치 신문사 외신부 역, 마이니치 신문사, 1957년))를 출판했다.[5] 1969년에 사망했다.[5]
6. 1. 맥아더 전기 집필
6. 2. 사망 및 묘소
휘트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5] 그는 또한 필리핀 레이테에 있는 맥아더 상륙 기념 국립공원에 있는 맥아더와 그의 일행이 레이테 해안에 상륙하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 중 하나로 등장한다. 휘트니의 조각상은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카를로스 P. 로물로의 조각상 뒤에 있다.[5] 1969년 사망했다.[5]6. 3.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1977년 영화 《맥아더》에서 휘트니 역은 딕 오닐이 연기했다. 제임스 웹의 역사 소설 "황제의 장군(The Emperor's General)"에서 휘트니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핵심 고문 중 한 명으로 자주 등장한다.6. 4. 한국의 시각에서의 평가
7. 수상 내역
1행 | 육군 훈장 | 은성훈장 | ||
---|---|---|---|---|
2행 | 공훈 훈장 (오크 리프 클러스터 포함) | 공로 훈장 |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 미국 방위 훈장 |
3행 | 미국 원정 훈장 | 아시아 태평양 원정 훈장 (은성 1개, 동성 2개 포함)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 점령군 훈장 |
4행 | 한국 복무 훈장 (서비스 스타 2개 포함) | 국가 방위 훈장 | 유엔 한국 훈장 | 필리핀 해방 훈장 (별 2개 포함) |
7. 1. 훈장 및 표창 목록
1행 | 육군 훈장 | 은성훈장 | ||
---|---|---|---|---|
2행 | 공훈 훈장 (오크 리프 클러스터 포함) | 공로 훈장 |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 미국 방위 훈장 |
3행 | 미국 원정 훈장 | 아시아 태평양 원정 훈장 (은성 1개, 동성 2개 포함)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 점령군 훈장 |
4행 | 한국 복무 훈장 (서비스 스타 2개 포함) | 국가 방위 훈장 | 유엔 한국 훈장 | 필리핀 해방 훈장 (별 2개 포함) |
참조
[1]
서적
Pacific Microphone
https://books.google[...]
Texas A&M University Press
2009-09-27
[2]
서적
American Caesar
1978
[3]
서적
Remaking Japan: The American Occupation as New Deal
1987
[4]
서적
Partners for democracy: Crafting the new Japanese state under Macarthur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5]
논문
Pacific Microphone
https://books.google[...]
Texas A&M University Press
2014-09-27
[6]
서적
American Caesar
1978
[7]
서적
日本国憲法成立史
有斐閣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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